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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 김방룡,김재영,안후상,김철수,남창희 외 지음, 기역, 2017년 10월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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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

 

완당 감재영 박사 화갑기념 논문집

펴 낸 날/ 초판1쇄 2017넌 10월 21일
지 은 이/ 완당 김재영 박사 화갑기념 논문집 발간 추진위원회

편     집/ 이영남, 이영석, 김민경, 김세미, 이우현
펴 낸 곳/ 도서출판 기역
펴 낸 이/ 이대건
출판등록/ 2010년 8월 2일 (제313-2010-236)
주     소/ 서울시 서대문구 북아현로 16길7 2층
문     의/  (대표전화)02- 3144- 8665,  (전송)070- 4209 一1709
 

서문


‘보천교의 민족운동사 연구’를 위한 첫걸음


일제강점기 내내 우리 민족의 구성원들은 열패감과 이질감, 그리고 암울함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였다. 특히 민족 구성원의 절대다수를 점하는 농 민층(이하 농민들)은 더욱 그러하였다.


암울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서구의 지식 체계를 받아들인 지식인(이 하 지식인)들은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농 민들은 이들이 벌이는 민족의 독립운동으로부터는 이격돼 있었다. 한국역사는 향후에 이들의 소작쟁의 정도를 소개하였다.


일제강점기의 농민들은 민족의 독립을 추구하는 민족운동과는 전혀 관 련이 없었을까? 또는 식민지배에 어떤 형태의 저항도 하지 않았을까? 그간의 한국역사는 지식인들의 그것을 민족운동으로 바라다 본 측면이 있다. 

 

“조선 각 지에서 흠치교라고 주장하는 것이 있어 준거(準據)할 수 있는 성전, 정해진 교리 없이 단지 미신을 설교하고 수년 이해력이 부족한 조선인을 조선인을 고혹(蠱惑)하고  일반의  풍교(風敎)를  악화시키고  있었으나  아직  정치적  색채를  띠지는  않았는데,  현재  행방불명인  교주  차경석은  일미(一味) 의  무리와  함께  대정  9년(1920) 3,4월경부터 이 교의 선전, 확장을 빙자하여 은밀히 조선독립을 꾀하게 되었다 …”

 

 

위와 같은 내용은 농민들을 상대로 후천선경 신정부 건설운동(일명 보 천교 운동)을 전개한 차경석(호가 월곡)이 은밀하게 조선의 독립을 꾀했다는, 당시의 판결문이다. 이와 같은 판결문은 수십, 아니 수 백 건에 달하지만, 한국역사는 이러한 기록들을 애써 외면하였다.

 

 

“… 이 교는 종교로 위장하였으나 사실은 조선독립운동 단체로써 갑자년 (1924)에는  교주  차경석은  계룡산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국왕이 될 것이니, 지금부터 이 교를 확장하여 자금을 모금함으로써 조선의 독립을 꾀하고 독립하는 그때는 교도는 상당한 대우를 받는다는 취지의, …  피고인 들은 각 이에 공명하여 국권회복운동을 결의하고 치성비를 납부했다. …”

 

 

일제는 한때 농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보천교(普天敎)를 종교로 위장 한 독립운동 단체로 바라다보았다. 차경석이 천자(天子)로 등극하면 교도 는 상응하는 대우를 받는다는 후천 선경국가 건설운동의 취지를 퍼트렸다 는 이유로, 다수의 농민들이 재판에 회부되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적지 않은 농민들은 한때 후천선경(後天仙境) 신정부 건설운동에 뛰어들었다. 예컨대 갈등과 전쟁, 차별과 억압을 상징하는 상극(相剋)의 시대를 도통(道通)으로써 상생(相生)과 평화(平和)의 시대로 바꾸자는 운동이었다. 당시 농민들은 후천선경 신정부 건설이야말로 암울한 현
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조선총독부는 한때 후천선경 신정부 건설운동을 주도했던 보천교를 예의 주시하면서, 때로는 탄압하고 때로는 회유하였다. 당시 지식인들은 보천 교를 무지몽매한 미신사교로, 때론 악(惡)으로 지목하였다. 더불어 박멸운동을 벌였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농민들에게서 어떤 주체적인 행동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어쩌면 농민들의 주체적인 행동을 인정하고 싶지 않 았을 것이다. 농민들의 능동적인 변화도 기대하지 않았다. 전(前) 근대적 사 유에서 벗어나지 못한 농민들은 오로지 계몽의 대상일 뿐이었다.


당시 지식인들이 믿는 것은 오로지 유럽 근대사에서 파생된 ‘민족(民族)’ 과 ‘근대(近代)’라는 사유 체계다. 이는 조선총독부가 보천교를 주시하 면서 했던 사유 체계이기도 하였다. 이는 오늘날의 한국역사가 강조하는 ‘ 근대성(modernity)’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제강점기의 근대성은 민족주의보다는 제국주의에 더 가까웠다. 그러 함에도 한국역사는 이러한 근대성을 민족주의와 연결을 시켰다. 근대화는 민족주의와 관계없이 이루어질 수 있고,
민족주의는 근대화를 지향하지 않 을 수 있으며, 근대화라는 개념이 너무 모호하다, 라는 지적들이 있는 데도 말이다.


어쨌든 일제강점기의 지식인들은 ‘근대’가 아닌 것은 ‘미몽(迷夢)’이고, 당시 보천교는 미몽의 상징적 존재에 불과했다. 단발에다 양복 입은 지식인 들은 서구의 계몽주의나 마르크스주의를 한국 사회에다 무분별하게 투사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에서 ‘민족’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미몽의 상징으로 여겼던 보천교가 때론 독립운동을 하는 단체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당시의 신문이나 잡지의 수많은 기록들과 적 잖은 판결문이나 검경 문서 등에는 분명 ‘보천교는 독립운동을 한 단체’였 다. 그런데 한국역사는 이러한 사료들을 애써 무시하였다.


단발에다 양복을 입은 지식인들과는 달리, 보천교는 상투에다 갓을 쓰 고 두루마기를 입었다. 그리고 동양의 고전을 읽고 주역(周易)을 섭렵하였 다. 왜산(倭産) 물산을 쓰지 않겠다던 보천교는 자급자족을 위한 종교적 경제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더불어 천자등극식(天子登極式)을 통해서 식민지 민중, 즉 농민들을 결집시켰다.


농민들은 보천교를 통해서 비밀리에 일제의 패망을 예언하였고, 집단 기 도를 통해서 그들의 패망을 앞당기고자 하였다. 심지어 명치(明治)와 소화(昭和)의 초상을 그려놓고서 복숭아나무 가지로 만든 화살을 쏘아 맞히는 의식을 치루기도 하였다.

 

“…  정공일이 명치신명을 향해 ‘만사무석(萬死無惜;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그 죄가 무겁다)한 놈이 무슨 면목으로 우리 조선에 오기를 원하느냐’면서 크게 꾸짖었다. 그러자 명치신명이 말하기를 ‘내가 미륵 세존의 명을 받아 조선의 일로 불려왔는데 조선 사람은 이러한 깊은 이면 을  모르고  증오와  戒視가 심하여 나는 떠날 터이니 술이나 한잔 주시오’ 라고 하였다고 한다.”

 

엄혹했던 시절에 농민들은 비밀스럽게 명치신명(明治神冥)을 불러다 놓고 크게 꾸짖었다. 그런데 꾸짖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탁주 한 사발을 건네주면서 다시는 이웃 민족을 괴롭히지 말라며 준엄하게 타일렀다.

 

이것 역시 일제강점기의 판결문이다. 당시의 농민들도 나름의 주체적인 행위를 했다는, 이와 같은 사료는 셀 수가 없을 정도로 많이 있다.


당시 농민들의 능동적인 변화도 있었다. 동학(東學)의 만민 평등사상을 계승하는가 하면, 민족의 독립을 위해 일하는 지식인들에게 큰돈을 건넸다. 또한 일제의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조직과 강령을 만들었다.


그렇게 수십 년이 지난 오늘. 한국역사는 일제강점기의 농민들의 이와 같은 행위들을 ‘전(前) 근대적’이고 때론 ‘반(反) 사회적’이라며 평가 절하 하였다. 더불어 “전근대적인 틀을 여전히 묵수하고 반민족적인 행위를 일 삼는 보천교는 사교이고 미신놀음에 불과하다”는 평가에 손을 들어주었다.

 

그렇지만 그간 향촌의 몇몇 연구자들은 일제강점기의 농민들에게도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행위들이 있었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농민들의 주체적인 행위들을 밝혀줄 기록들을 발굴하고 정리해나갔다. 더불어 한국역사의 보천교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국가기록원에서 분류한 보천교의 ‘독립운동관련판결문’은 기성종교의 판 결문건보다 훨씬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일부 신문사에서 분류한 ‘항일기사 건수’는 왜 기성종교의 그것보다 수배나 많으며, 보천교 계열의 독립유공자가 왜 140여 명이나 되는 지에 대한 의문들이었다.


이처럼 황막한 학문의 현실에서 향촌의 몇몇 연구자들은 보천교에 대한 일반 인식, 즉 부정적 인식에 맞섰다. 물론 보천교의 부정적 인식을 전면 부 정하는 건 아니다. 보천교의 행위들 가운데는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도 있는 면들이 있다. 하지만 오늘 날 보천교의 일반 인식은 보천교에 대한 부정 또 는 긍정의 평가 그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러던 차에 보천교 연구의 일말의 결과들이 나타났다. 최근에는 전라북 도와 정읍시의 지원 아래에 사단법인 정읍역사문화연구소가 주최한 “동학농민혁명 이후 근대 민족운동-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2016년 8월)이라는 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이어서 정읍역사문화연구소의 “두 번째;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2017년 5월)이라는 학술대회가 열렸었다.

 

앞의 두 번의 학술대회와 완당 김재영 박사의 회갑(回甲)을 맞이하면서 관련 연구서(논문집)의 출판을 요구받게 되었다. 출판과 관련한 실천적 논의가 정읍역사문화연구소 내부에서 있었고, 그 결과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이 나오게 되었다.


이 책의 출판으로 보천교의 민족운동이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연구 과 정을 다시 거쳤으면 하는 바람이다. 더불어 보천교의 민족운동을 천착하는 몇몇 연구자들의 고군분투, 열악한 연구 환경, 턱 없이 부족한 연구 역량 등 을 그대로 드러내고 싶었다. 느껴 본 한계를 바로 알려야만 새로운 대안이 제시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막막했던 출판 작업을 어떻게 해 왔는지 아직도 어리둥절하지만, 일단 정리해놓고 보니 뿌듯한 마음 숨길 수가 없다. 이러한 작업이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사 연구의 공정성과 다양성이 보장받는 첫 걸음이었으면 한다.

 

2017년 10월


완당 김재영 박사 화갑기념 논문집 발간 추진위원회 안후상 씀
 

차례


회갑화서
완당 김재영 박사 약력 및 연구실적
서문

 

Chapter1. 특집논문
강증산과 차월곡의 개벽사상(김방룡)
동학 이후 증산계열의 민족운동(김재영)
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독립운동-온라인 국가기록원의
‘독립운동관련판결문’을 중심으로-(안후상)
일제 식민권력의 기록으로 본 보천교의 민족주의적 성격(김철수) 일제하 전북지역 민족종교 세력이 한미관계 정체성 형성에 미친 영향에 대한 시론(남창희)

 

Chapter2. 특집논설
동학농민혁명 이후 근대 민족운동-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
학술대회 배경과 향후 과제(장학수)
보천교와 월곡 차경석을 다시 보다(윤석진) 

Chapter3. 일반논문
보천교의 예언사상(김탁)
한국 민족종교 지식지도; 보천교(안후상)
보천교와 영호남 농악(박상주)
정읍 입암·태인의 신종교적 흐름(이진우)
일제하 민족종교에서 간행한 간행물 조사-증산교를 중심으로(안후상)


Chapter4. 자료
구술; 보천교 수위간부 김홍규, 1921년에 독립자금을 모금하다가 체포되다
(정리_안후상)
구술; 1945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선생, 정읍 태인의

김부곤선생 댁에 머물다(정리_김재영·안후상)
자료로 정리해 본 ‘일제강점기 보천교 운동’(안후상)


저자소개 

 

* 본 서는 시중 온, 오프라인 서점에서 구입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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